이자는 조국을 배신한 반역자란 말입니다 !!!

공지사항 25.05.19

   저희집의 몰락은  확실히 1980년에 있었던  전두환의 언론통폐합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 겨우 국민 학교 6학년밖에 안된 어린아이가  집안이 몰락하는거랑 무슨 관련이 있겠냐  싶겠습니다만  지금와서 그동안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확실히 그래요   사실 저는  1980년 전두환의 언론통폐합으로 인해  폐방된 TBC 방송국 어린이 합창단원이었습니다  그때...TBC가 폐방되었을 때  어린이 합창단원은  일부는 KBS로 흡수되기도 하고  어떤애들은 그대로 합창단 생활을 그만두기도 하고  또 어떤 아이들은 집안이 아예 해외로  이민을 떠나거나 다른지역으로 이주하는등  그런식으로 뿔뿔이 흩어졌지요  저희집의 경우도  막상 그렇게 TBC가 폐방되고 어린이 합창단도 해산되니까  엄마가 제게  ‘카나다로 이민을 가자’ 권하시더군요  사실 그때 저희집의 경우엔  제가 합창단 생활을 더 못하게된 이유도 있지만  거기에 아빠도 사업을 하다 망해 엄마랑 이혼하고  집안꼴이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을때에요  엄마가 제게 해주신 말씀을 한줄 요약하면  카나다에서 의상실을 운영하는 언니(저한테는 이모)가 있으니  거기가서 이모일을 도와주며  저는 저대로 학교다니고 하면  그런대로 적응하며 살수 있을거라  설득하시더군요   어린 제가 뭘 알겠습니까  여하튼 저도 그렇게 막상 제가 활동하던  어린이 합창단이 해체되고 나서  뭘 어떻게 해야할지몰라 한참 망연자실하고 고민하던때  엄마의 그와같은 위로와 설득이 있자  한 석달여정도의 시간이 지난뒤  엄마와 함께  카나다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엄마의 말대로   카나다의 한 도시에서 의상실을 하며 산다는  이모네집 살면서  엄마는 이모일 도와주고 그리고 전 저대로  학교다니고  그렇게 카나다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 한것입니다   카나다에서의 생활  솔직히 처음부터 바로 적응이 되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영어 배우고 어느정도 익숙해질떄쯤  학교 등록하고 그렇게 다니다보니  한 6개월-1년정도 지나니까  슬슬 카나다의 학교 선생님 강의도 귀에 들어오게 되고  아이들과도 짧은 대화정도는 나누며  사귈수 있게되고  그렇게 차츰 적응이 되더라구요  그렇게 차츰 카나다에서의 생활에  적응이 되면서  한 3년 좀 넘게 활동했던 TBC 어린이 합창단 시절의 일은  추억인양 잊혀져 갔습니다   비극은...  그것이 끝이 아닌 시작이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전에  카나다와 한국이 학제가 다르다는건  대충 상식으로라도 알고 계실거에요  하지만 혼돈을 없이하기 위해  그냥 적당히 한국학제에 대입해서  언급해 나가겠습니다   막상 그렇게   TBC 어린이 합창단 생활을 더 못하게 되어  엄마와 함께 카나다로 떠나 시작한 새로운 생활  그게 제 중학교 입학할 무렵  이모님은 그렇게까지 잘 산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저랑 엄마 두 사람 정도는 거둬서  먹여줄만한 재력은 있었기에  그렇게 엄마는 이곳에서 이모 의상실 일 도와주면서  저는 저대로 학교다니며  그렇게 살아가게 될줄 알았습니다  - 참고로 이모님 내외 슬하에 자녀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략 고등학교 2학년 무렵에  이모님 내외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래도 어느덧 카나다 생활을 시작한자  5년남짓 되는 무렵인데  그래도 갑자기 들이닥친 이모내외 사망소식에  저도 엄마도 황망해서 어쩔줄 몰랐죠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엄마도 막상 그렇게 지금껏 자신을 보살펴준  이모내외의 갑작스러운 사망소식에 충격을 받았는지  시름시름 앓다가  1년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로선 중요한 시기온 고2-고3 무렵에  저를 돌봐주는 엄마와 이모를  연달아 잃는 아픈일을 겪게된거죠  그렇게...막상 엄마도 이모도 연달아 잃고나니까  그래도 카나다 학교에 적응하면서  이곳에서 산지 어느덧 5-6년이건만  아무도 아는이 없는 낯선땅에 저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겁이 덜컥 났습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할지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았던거에요   뜻밖의 인연을 하나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순서대로 따지면  제가 엄마와 이모를 모두 연달아 잃은 그 뒤는 아니고  대략 제가 그런 슬픈일을 연달아 겪던  딱 그 무렵의 일이었어요   그런 이야긴 다들 들어보셨을겁니다  가령 그 시잘(1970-80년대)에도 그런 이야긴 있었으니까요  미국에서도 LA나 뉴욕같은데 한인타운서 살면  영어 한마디 못하고도 충분히 살아갈수 있다는  하지만 제가 사는곳은 미국이 아닌 카나다  물론 카나다도 미국만큼은 아니더라도  많은 한국 교민들이 사는곳이긴 하지만  미국이든 카나다든 모든 교민이 한인타운에 모여사는건 아니고  사실 엄마나 이모내와가 사는곳은 그런 한인타운이나  한인 밀집지역에선   어느정도 거리가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엄마나 이모나 나름의 상처나 이유가 있는것인지  카나다에서 살면서  같은 한인과는 가급적 교류를 안 하려드는 느낌이었어요  가령 어쩌다 가게나 집 근처에서 동양인을 만나도  일부러 피하거나 웬만하면 말을 잘 걸지 않으려하는  그게 어린 제 눈에도  충분히 느껴졌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에도  솔직히 비단 한국인뿐만 아니라  동양계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실제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는동안  그리 많지 않은 동양게중 한명이라서인지  호기심에 다가오거나 하는 아이들도 많았으니까요  짖궂은 사내아이들의 추근댐도  간혹 있었고  그러고보면 중,고등학교 생활을 보내는동안  동양계는...아마 중국계가 다른반에  한두명 있다는 이야긴 들어본것같고  일본계와 잠깐 같은반에 배정받은일이 있긴한데  다만 저희때문해도 일본 자체를  북한 공산당보다도 나쁜X들로 가르치던때라서  중국계라면 혹시 몰라도 일본출신이라면  제가 더 가까이 다가가고픈 마음이 없어서  일부러 거리를 두며 지냈습니다   그러다...  저보다 나이는 한 살많은  뜻밖에 한국인 교포(?) 오빠를 만난게  대략 제가 고2 무렵이었습니다  오빠를 처음 알게된건...아직 이모님 내외가  돌아가시는 사고를 당하기도 전이긴 한데  사실 저로서도 거의 5-6년만에 만나보는  한국인이라 반갑기도 하고 감격도 되어  한동안 그 오빠와 꽤 친하게 지냈습니다  오빠의 말로는 나이는 한 살 위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학교를 일년 늦게 들어와서  저와는 동급생이 된거라고 하네요  뭐 여하튼 처음엔 그저  카나다의 학교 들어와서 처음 만나는 한국계라서인지  너무 기쁘고 반가와  한동안은 철없이 너무 가깝게 붙어다녔습니다    .....   오빠의 말로는 실향민 2세라고 하더라구요  그러니까...아버지가 6.25때 월남한 실향민이고  하지만 남한에서의 생활도 좀 여의치 않았는지  이후 카나다로 이주하셔 살아오셨다고 하네요  - 나이가 좀 안 맞지 않느냐는 의심  그땐 아직 어리고 철없고 세상물정 모를떄라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는 한국계를 만났다는 반가움 때문에  아무생각없이 즐겼고 오빠말을 곧이 들었습니다  오빠네 집에 들러 부모님을 만나뵙기도 했어요  와~~~  막상 처음 오빠네집 놀러갔을 때는  생각보다 잘사는집이라 무지 놀랐습니다  미국이나 카나다로 이민가서 소위 자수성가해서  잘살게된 분들도 많다고 하더니  오빠네 아버님도 그런분인가보구나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요    헌데 보니까...오빠한데 어머닌 안 계신 것 같고  오빠외에 다른 형제도 없는 듯 하더라구요  - 근데 뭐 그런식으로라면 저도 아빠가 사업이 망해  카나다로 이주해오기전 이미 이혼한 상태였고  저 또한 다른 형제없는 외동딸인건 마찬가지라  그건 뭐...제가 의심할일이 되지 못했죠  - 게다가 그 시절 한국은 소위   ‘아들딸 구별말고 둘만낳아 잘기르자’ 운동 하던 시절이잖아요 ^^;;   그래서...  실향민출신 카나다 교포...그런 아버지를 둔 오빠  의심하지 않았죠  보니까 오빠네 아버지는 외부에서 손님을 맞이하거나 할때는  한국말은 거의 쓰지 않는 듯 했는데  집안에선 영락없이 한국말을 썼습니다  뭐...실향민이라니까 이북 사투리는 확실하게 썼고  하지만 종종 나오는 북한말투와 표현을  스스로도 뭔가 조심하거나 주의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빠한테도 가끔 너무 ‘북한식 말투’를 쓰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듯 했는데  그때가지도 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 여기서부터는 편의상 ‘오빠네 아버지’를    그냥 아저씨라고 호칭하겠습니다)   아저씨가 제게 가끔씩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아니, 그보다 앞서  제가 엄마랑 이모를 연달아 잃고  하필 대학도 들어가야하는 시점에서 이 낯선 타국땅에서  혼자될 처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오빠로부터 들은 아저씨는  ‘혹시 우리집에 들어와 살아보지 않겠느냐 ?  우리집에서 숙식하면서 크게 말썽만 부리지 않고  잘만 지내면 대학정도는 보내줄수 있다’  그렇게 제안하시더라구요  어린나이에 엄마와 이모를 연달아 잃은 저는  무엇보다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가 막막해  아저씨의 제안에 다른건 생각해보지도 않고  솔깃 제안에 응했습니다   아저씨가 제게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제가 연달아 힘든일을 겪고난뒤  아저씨네 집에서 오빠랑 같이  생활하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렇다고 뭐 처음부터  대놓고 ‘김일성 만세’라도 부른건 아니고  가령...지하철이 서울보다 평양이 먼저 생겼다느니  여성차별은 남한보다 북한이 먼저 없앴다느니  반공교육을 받고 자라 북한사람들을 전부  ‘뿔달린 도깨비’나 괴물이라도 되는줄 알고 살아온 제게  최소한 북한도 ‘사람사는곳’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주는  그런 ‘교묘한 말장난’을 시작한거죠  헌데 그러고보니 6.25떄 월남한 실향민이란분이  6.25가 있인 이후에나 북한에서 벌어진 일들을  너무 잘 알고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  적어도 그땐  제가 너무 어리고 철없고 세상물정 모르는 탓도 있지만  그때만해도 무엇보다 연달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경황없던차에  아저씨가 그저...절 거둬주신 고마우신분  그 정도로만 생각했기에  다른 의심은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거죠   아저씨가 절더러  ‘차라리 북한에 가서 한번 살아보는건 어떻겠느냐 ?’며  회유하기 시작한건 그 무렵부터였습니다  그렇게 가족들도 다 연달아 잃게되었고  카나다에 딱히 다른 아는 연고가 있는것도 아니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여의치않으면  자신을 따라 북한으로 들어가보자고  북한에서 대학을 다녀보는것도  과히 나쁘지 않다며  그렇게 절 회유하더군요  아무리 지금까지 제게 잘해주신 아저씨라도  슬몃 의심이 들어 결국  그렇게 묻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혹시 간첩이었던거냐 ?’고  그러자 아저씨는 껄껄껄 호탕하게 웃으시며  ‘사업을 하느라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다보니  종종 북한땅에도 들어가보는일이 있을뿐’  그런건 아니라구요  그러면서 거듭 제게  북한에서 대학을 다녀보는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다고  연거푸 저를 회유하였습니다    실향민 출신이라면서...북한을 그렇게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단말인가 하는 의심까진  할 여지없이  일단 저로선 엄마도 이모도 모두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 카나다에서 살아가기도 쉽지 않아  아저씨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아저씨의 거듭되는 설득에 넘어가  결국 북한땅을 밟았습니다  북한당국이 저를 소위 ‘의거입북자’에 해당되는  자진월북자로 받아들인건지 어쩐지는 모르곘지만  막상 들어가보니 우리나라로 치면 안기부에 해당되는  그런 정보기관에서 한바탕 이것저것 조사를 하더군요  조사를 하는과정에서  전 뭐 굳이 숨길이유는 없은것이라  남한에서 살 때 ‘TBC 어린이 합창단’으로  3년 조금 넘게 활동했고  하지만 전두환의 언론통폐합때 TBC가 폐방되고  어린이합창단도 해체되어  이후 엄마를 따라 카나다로 가서 살게된것이라  사실대로 저의 전력을 말했습니다  TBC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제가 남한에서 방송국 어린이 합창단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북한측으로선 무슨 뜻밖의 월척(?)이라도 낚았다는  생각을 했는지  자기네들끼리 뭔가 진지하고 심각하게  상의를 하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일단 조사기간과 그리고 세뇌교육 비슷한  그런 과정을 밟고서  저를 평양 인근지역 한 아파트에 살게 해주더이다  일단 이제 막 20대 초반이 된 어린여성이 혼자인지라  그 정도 여성이 혼자살수 있을만한  작은평수 아파트였습니다. 굳이 남한에 비유하졈  자취방 비슷한 형태라고나 할까요  거실하고 작은방 두게 그리고 부엌과 욕실등  갖출건 일단 다 갖추어있더라구요  - 그리고 제가 배정받은 아파트가  납북이든 월북이든 그렇게 북한땅으로 들어오게 된 이들을  별도로 관리하는 그런 공간이란 것을 알게된건  시간이 훨씬 지난 나중의 일이었습니다  일단 절 원하는대로 대학은 다니게 해주더군요  그렇다고 무슨 김일성 대학쯤 되는 대단한 학교에 보내준건 아니고  평양 인근 지역에 있고 거주지로부터도  그리 멀지않은  그런곳에 위치한 대학에 배정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학 한 2학년쯤 되었을 무렵에  한떼의 사람이 절 찾아오더군요  나중에 알고보니 바로 북한의 방송사에서 일을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는데  제게 간단한 발성이라던가 노래실력 테스트  그런 것을 거치더이다  그리고 절 바로 곧장 어디론가 데려가서는  원고 비슷한 것을 건네주며 읽어보라 하더이다  내용은 대충...일단 남한체제 비방내용은 아니고  대략 북한 사람들의 평범한(?)일상이 담긴  거기에 대충 김일성을 찬양하는 그런 애용이 끼워넣어져 들어간  그쯤되는 내용이더이다  뭐 어차피 전 일단 북한에서 살기로 한 사람  시키는대로 원고를 읽어내려갔고  그런대로 제 낭독실력이 괜찮았는지  합격점을 주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얼마후부터  방송국에서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정확히는  북한에서 남한체제나 사회의 이런저런 모순들을 헐뜯는  이른바 ‘대남(對南)’ 비방방송의   아나운서 역할을 하게된거에요  일주일에 두 번정도는 대남비방방송과 남쪽을 향한 북한찬양  두 번정도는 원고작성과 자료준비  그리고 나머지 하루는 회의외 생활총화  뭐 대충 그 정도가  저의 방송원 활동 일과였습니다  아침,저녁으론 저의 출퇴근을 도와주는 차량이 당도하곤 했는데  말이 출퇴근을 도와주는거지  사실상의 감시원 역할이었습니다  막상 이런일을 하게되니까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뒤늦게나마 아저씨한테 속았다는 생각도 들고  아무리 그래도 한국에서 한떄 어린시절  방송국 어린이 합창단원까지 한 제가  북으로 와서 대남비방방송의 방송원이라니  여러 가지로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아, 참 그러고보니...  절 북한으로 데리고온 아저씨  그리고 아저씨의 아들인 처음 학창시절 저한테 잘해주고 위로해준  그 ‘오빠’는 막상 북으로 들어와서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것 같네요  그러고보니 그 아저씨 아들이 맞기는 한건지  아니 그보다 그 오빠의 구체적인 정체가 뭔지  더 궁금해지더이다  달리 아저씨는 그래도 가끔 제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긴 한지  아니면 그 아저씨도 결국 제 감시 역할인건지  두어달에 한번정도는 절 찾아와서   ‘어찌 지내느냐 ?’고 물어보시더군요  저야 뭐 이미 그 아저씨하곤 말도 하고싶지 않은 심리상태가 되어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 헀지만  아저씬 때론 껄껄 웃으시며   ‘세상사가 다 그런거’라며 때론 절 달래기도 하고  때로는 ‘적당히 까불라’며 마치 봐주는것도 한도가 있고  자꾸 심통부리면 재미었다는 듯이  위협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하루종일 그렇게 방송국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피곤해서 바로 잠을 청했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살게된 아파트에도  혹시 감시원이나 도청장치 같은게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도 되어  공연히 쓸데없는 짓이나 말을 했다가  잘못되는거 아닌가 싶어서라도  퇴근해선 별다른 하는일없이 적당히 밥먹고는 누워서  잠을 청했습니다  한번은...제 출퇴근을 도와주는 아저씨(감시원)에게  술을 좀 구할수 있냐고 물었더니  의외로 이런건 손쉽게  한병 구해다 주시더군요  그래서 정히 속상히 힘들거나 견디기 어려우면  퇴근떄 아저씨한테 술이나 한병 사달라고 해서  집으로 들어와서 먹고는 바로 뻗어서 잠들고  그럤던거죠   KBS 사회교육...방송이던가요  솔직히 한국에서 살때도  그리고 이후에도 그런건 잘 몰랐는데  그래도 제가 사는 집에 라디오가 하나 있어서  가끔 다이얼을 돌려 틀다가  우연히 한국 방송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남한에서 북한으로 보내는 대북방송  ‘KBS 사회교육방송’이더군요  맨날 남한 헐뜯는 내용 아니면 북한주민 일상(?)에  적당히 김일성 찬양하는 내용 섞어서 방송을 하는게 지겨워서라도  사회교육방송에 흥미가 느껴져 귀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 솔직히 한국에서 쭉 그냥 살았다면  귀담아듣지도 않았을 방송인데요   보고싶은 얼굴...그리운 목소리...  KBS 사회교육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낭랑한 아나우선의 목소리를 듣다보니  문득 TBC 어린이 합창단으로 활동할때의 동료,친구들도 생각나고  언론통폐합으로 TBC가 폐방되고 합창단이 해체되던  그때의 일들도 떠올려지곤 해서  들을때마다 눈물이 나 울고 또 울었습니다  행복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일상이라던가  한 10분정도 분량으로 전해주는 새소식(뉴스)  그리고 이런저런 드라마나 꽁트...그런걸 들으면서  바로 북한으로 온게 후회되더라구요  좀 힘들더라도 남한에서 그냥  어린이 합창단 생활은 더 못하게 되었더라도  그냥 평범한 공부하는 학생으로 자랐더라면  나도 그냥 남한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20대 여성으로 살고있을텐데  공연한 선택을 해서 여기까지 와서 생판 엉뚱한짓을 하고있는 나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에  사회교육방송을 트는날이면  울지 않을래야 울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TBC 어린이 합창단은 그때 해체되어  뿔뿔이 흩어졌지만  혹시 그때 합창단원을 하던 동료나 언니중  KBS 사회교육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지  난 졸지에 납치로 봐야할지 자진월북으로 봐야할지조차  좀 애매한 이런 상황으로  북한까지 와서 대남비방방송 아나운서가 되었는데  그때 TBC 어린이 합창단을 하던 사람중  kbs로 들어갔든 나중에 성인이 되어 입사를 했든  TBC 어린이 합창단 출신중 KBS 사회교육 방송을 진행하는  아나운서나 리포터가 있을 가능성은  확률적으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혀 있을수 없는일은 아니기에  보고싶은 얼굴...그리운 목소리들을  하나하나 그 이름들을 불러보며 외쳤습니다  그 시절 함꼐 어울리던 TBC 어린이 합창단원출신  동료,언니들의 이름을 말이죠  ‘OO아 !!! OO아 !!! 나 여기있어 !!! 그때 너희랑 어울리던  TBC 어린이 합창단 ( )기 OOO  지금 여기 있다구  어쩌다가 북한땅까지 오게되어  그것도 대남비방방송을 하게 되었는데  제발 어떻게 해서든 나 좀 구해줘’  겉으로 대놓고 외치진 못해도  속으로 그 말을 수도없이 되뇌이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탈출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북한땅을요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그래도 한때 남한에서 방송국 어린이 합창단까지 했던 제가  이곳에서 대남 비방방송이나 하면서  생을 마칠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고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어쩌다 북한 간첩의 꾀임에 빠져  자진해서 북한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후회했고  그래서 다시 탈출해서 남한으로 돌아왔노라  정보기관에 자수해서 깨끗하게 모든걸 사실대로 밝히고  이후 예전 합창단 시절 알고 지내던  동료를 찾아가든 방송사 관계자를 찾아가든  그렇게하면  최소한 남한땅에서 남은 여생을 찾아갈  살길이 열리겠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탈출 시도는  좀 즉흥적으로 사전에 아무런 치밀한 준비없이  시도한것이라  허무하게 실패로 끝났습니다  일단 무작정  최소한 제가 사는 – 대개는 납북자나 월북자가 사는 것으로  추정되는 - 아파트 단지라도 벗어나보자는 생각에  휴일에 무작정 집을 나왔습니다  하지만 단지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아파트를 관리하는이(* 역시 사실상 감시원)가  ‘어디가냐 ?’고 물으며 다가오길래  전 일단 처음엔 휴일이라 심심해 산책이라도 하려고  한다며 적당히 얼버무렸지만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관리인 아저씨가 다른 사람들을 부르며  ‘대체 어디로 간다는것이냐 ?’며 집요하게 물어보길래   그만 덜컥 겁이나서  ‘미안하다’며 다소 허무개그처럼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곘다는 생각에  두 번째 탈출시도는 좀 치밀한  계획을 짜기로 했습니다  그러고보니 북한에 차는 잘 없고  아파트 단지안에 아마 출퇴근을 하는이들이 쓰는듯한  자전거가 몇 대 보여서  저걸 타고 탈출해보자  그 생각을 했습니다  우선 하루는 저의 출퇴근을 도와주는 감시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북한에도 고속도로가 있냐 ?’고  얼핏 북한에도 고속도로가 있긴 있다고 한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정확치가 않아 확인차 겸사겸사  그렇게 물어본거죠  감시원은 좀 이상했는지 ‘왜그러느냐 ?’고 제게 물어보았고  전 일단  ‘실은 예전에 남조선에서도 고속도로를 짓는다 어쩐다  한바탕 난리법석을 친적이 있어서...혹시 북한도 그런게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라고  둘러댔습니다  - 남한은 북한보다 훨씬먼저 고속도로가 세워져  성공적이었고 다들 잘만 이용하여 일일생활권이 되었다  이런말을 하지않고 그냥  ‘남한도 예전에 고속도로를 짓는답시고 난리법석을 떨었었다’  그런식으로 말한걸보면  그래도 저도 어느새  북한에서 살아가는법을 나름  터득하긴 했나봅니다   제가 그렇게 (남조선에선 예전에 고속도로를 짓는답시고  난리법석을 떨었던적이 있다)고 말하니  감시원은 제법 신나게   북한엔 일단 평양에서 원산까지 가는 고속도로가 있고  평양에서 휴전선 인근지역ᄁᆞ지  가는 고속도로도 하나 있다며  역시 친애하는 김일성 수령님 은덕으로 어쩌구 저쩌구 하는  북한식 찬양을 섞어  자랑스레 늘어놓더이다  허나 전  ‘휴전선까지도 놓여진 고속도로가 있다’는 말에  되었다...며 속으로 ‘하늘이 나를 돕는다’는 생각에  쾌재를 불렀습니다   어느날 하루 날을잡아  단지안에 있는 자전거를 훔쳐타고  휴전선쪽으로 나있는 고속도로를 타고  달아나기로 결심한것입니다  다만...  일반 승용차라면 평양에서 휴전선까지  한 두어시간이면 당도하곘지만  자전거로...그것도 제가 근본적으로 북한땅 지리에   익숙치 않으니 경우에 따라선  설마 그래도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진 않겠지만  한 2-3일 정도는 걸릴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약간의 비상식량까지 준비해서  나름 다소 치밀한 준비를 하고  탈출계획을 꾸몄습니다    두 번째 탈출시도  미리 준비한 비상식량을 가방안에 넣고  사람들이 다 잠든   감시를 하는 관리원들도 다 잠들었을 틈을타서  자전거를 타고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준비해둔 지도로 평양시내에서 고속도로로 진입할 수 있는 도로를  미리 확인한뒤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잡히면 끝이라는 생각에  혼신의 힘을 다해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일단 평양시는 무사히 빠져나왔고  솔직히 자전거를 모는데 너무 힘을 쓰다보니  좀 지치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시간이 지체되어  저를 감시하는이들이 제가 탈출을 시도한걸 알면  끝이다라는 생각에  눈을 붙일 생각도 못하고 그저 팔다리 아픈것만  잠시 쉬게한후  정신없이 고속도로를 통해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남으로...남으로...  그리운 내고향 대한민국을 향해  지긋지긋한 북한땅을 떠나기위해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사실 밤새 최대한 자전거를 달려   무작정 남쪽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너무 안일했을까요  솔직히 가면 갈수록  무엇보다 한밤중이니만큼  몸이 아프고 피곤해지는걸  견디기 쉽지 않더이다.  아무리 그래도 잠깐은 쉬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자전거에서 내려 한 10분정도만  쉴까 했는데  그만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앗차 !!!’ 싶어 눈을 떴을때는  어디선가 요란한 사이렌소리...불빛소리  그리고 어떤 일련의 차량이 저를 발견한 듯  에워싸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뿔싸 !!! 들켰구나. ’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어느덧 차에서 내린 보위부 요원으로 보이는듯한 사람들이  절 에워싸더군요  그리고 매섭게 추궁하더이다  ‘뭐냐 ? 혼자 어디로 간것이냐 ?’  이미 변명을 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  전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보위부에 끌려가선  한 며칠동안 매서운 추궁을 받았습니다  ‘언제부터 탈출을 시도했느냐 ?’, ‘혹시 동조자나  도와준이가 없느냐 ?’에서부터  심지어 북한땅으로 들어온 것 자체가  애초부터 간첩으로 들어온 것 아니냐는 질문까지  별의별 질문을 다 하더군요  다만 그렇게 보위부안에 갇혀 며칠 있다보니  자기네들끼리 뭔가 수군거리며  회의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최소한 북한 사람들이라고해서  아주 뿔달린 도깨비는 아니고   최소한의 인정은 있는 사람이란걸  느끼게 되는 순간아었다고나 할까요  각서를 쓰라고 하더군요  아직은 그래도 젊고 앞날이 창창하다 생각해서  한번은 기회를 주려는것인지  아니면 아직은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한것인지  각서에는...한번만 더 탈출을 시도하면  그땐 진짜 끝장인줄 알라는 내용과  죽는날까지 김일성과 북한에 충성하며 살겠다는  뭐 대충 그런식의 내용이 담겨있다이다  저는 체념한체  각서에 서명하고 지장까지 찍고나서야  훈방조치되어 집으로 돌아올수 있었습니다  막상 그렇게 돌아오게된 저  최소한 목숨은 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어떤 절망감과 허무함이 순식간에 몰려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한동안은 망연자실하게  집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꼼짝달싹 못하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고보니 한동안은  저를 출퇴근시키는 차량도 오지 않아서  혹시 이대로 방송국 일은 더 못하게 되는것인가  아니면 어디 멀리 진짜  산간벽지나 아오지탄광 같은데로  추방되는것인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다만 다행히(?) 그 정도까진 아니고  한 일주일여쯤 지나니까  차량이 다시 오긴 하더군요  다시 방송국으로 출근하라고  다행히 해고되거나 추방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계속 방송국으로 출퇴근은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좀 뜻밖의 제안을 제게 하더군요  ‘혹시 결혼할 생각 없냐 ?’구  그러고보니 제 나이 어느덧 20대 중반이기도 하지만  그런 문제를 떠나서  여러 가지로 황당하고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더이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이렇게 남한출신으로 북한땅에 들어와서는  대남비방방송이나 하고있는 저같은 여자와  결혼할 사람이 있긴 한건지  다만 어쨌든 ‘싫다’고 반항할 처지는 못되기에  그리고 저랑 결혼시키려는 상대 남자가 대체 어떤사람인지  궁금하긴 했기에...  사실 북한에서의 일에 맞선이니 소개팅이니 하는  남한식 개념을 갖다붙이긴 좀 그렇지만  대충 그렇게 맞선 혹은 중매 비슷한 형태로  남자를 만났습니다   남자의 첫 인상은 일단  뭐 딱히 그렇게 잘생겼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비호감은 아닌  그야말로 그저그런 남자...그런 수준이더군요  그리고 좀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나이는 저보다 두 살 연하였습니다  그러고보면...북한은 남자가 나이가 많고 적고  그런걸 별로 안 따지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일단 대체로 말수가 적고  낯빛이 어두워보여...  혹시 무슨 말못할 사연이나 사정이라도 있는 사람인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라구요  솔직히 북한 당국이 그것도 월북 내지는 납북의  애매한 처지로 들어와서는 대남방송 일을 하다  탈출을 꾀하다 실패한 저같은 여자에게  소개시켜주는 남자가...그렇게 정상적인 남자는 아닐것같다  그런 예감이 들긴 했지만   대충 대화를 나눠보다  그 사람도 남한 출신이란 뜻밖의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이는 나보다도 두 살 어린 사람인데  게다가 남한에서 왔다고 ???  ‘아...’  순간...머리속으로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도대체 어쩌다가 나보다도 젊은 사람이  이곳 북한땅까지 들어오게된것인지  거...남한에서 살던 어린시절 반공교육시간에 듣기로는  북한에서 가끔 초,종,고생 어린아이를 꾀어서  납치해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럼 그런 경우인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일단...결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북한당국이 대체 무슨 꿍꿍이로  같은 남한 출신인 저희 둘을 연결시켜주려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저도 뭐 이런 북한당국의 처사에  반항하거나 거절할 처지도 못되고  대충 분위기나 느낌상 남자의 처지도 저와  그리 달라보이지 않을 것 같기에  일단 결혼하기로 결심했죠  ‘결혼하자’는 제 말에 남자는 좀 어이없다는 생각이라도 들었는지  ‘피식’ 헛웃음을 터트리더이다  둘이 그렇게 결혼을 했고  제가 살던 집에 신혼살림을 꾸렸습니다  결혼을 하고나서 안 사실인데  남자도 어디 출퇴근 하는곳이 있기는 한가 보더이다  매일같이 남자 데려다주는 차량이  당도하긴 했어요  마치 저를 감시하면서 대남방송을 하는 방송사까지  출퇴근을 시켜주는 차량이 있는것처럼  남자를 출퇴근 시켜주는 차량도 역시  감시원 역할이겠지  그 생각까지는 들었습니다   한...며칠 지나 남자에게 물어봤어요  ‘도대체 하는일이 뭐냐 ?’고  남자는 제게 뭐 굳이 숨길일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사실대로 말하더군요  실은 남한으로 파견되는 간첩이나 공작원들에게  남한의 실상이나 지리,문화 이런것들을 가르쳐주는  ‘교관’ 역할을 하고 있다구요  ‘아...!!! ’  다시 어떤 절망감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이자들이 그러고보니 이런식으로 남한사람들을 꾀어  이런식으로 대남공작원이나 대남비방방송같은걸 시키며   때론 결혼도 시켜주고 그러나보다’  그 생각이 그 순간 들더군요  그러고보면...  납북이든 자진월북이든간에  그렇게 북한땅으로 들어와선  대남비방방송 아나운서를 하는 여자와  간첩,공작원에게 남한실상을 알려주는 교관일을 하는 남자  그런대로  어울리는 커플(?)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3류 반공소설을 써도 딱 어울릴법한  그런 조합의 소재잖아요 ^^;;;;   결혼을 하고 석달여쯤 된 어느날  저는 퇴근을 한 남편을 은밀히  도청이 안 되는 방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한번 안아보고  키스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괜찮다’고 ‘난 어쨌든 당신의 아내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그러니 진실을 말해달라고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것이냐고  남편을 사랑한다고 말한 그 순간의 마음이  진실인것인지까진 모르곘지만  최소한 대체 어떤 곡절이 있어서 남한출신의 젊은 사람이  북한땅까지 오게된것인지  그리고 북한당국이 무슨 속셈으로 이런 사람을  나와 결혼시킨것인지 궁금해서라도  그렇게 물어보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이곳에선 주로 남파 공작원이나 간첩을 대상으로  남한의 실상이나 문화,정보따위를 알려주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람  사실 처음부터 뭔가 모르게 어두운 인상이 느껴졌고  그것보다 더 마음에 걸렸던 것은  그 사람의 눈빛에서 간간이 느껴지던  살기...였습니다  대관절 무슨 사연이 있기에  무슨 곡절이 있어 이곳 북한땅까지 오게 된것인지  강제납북이든 어떤 브로커나 공작원에게 속아  자진 월북 비슷한 상황이 만들어져 들어온것이든  그 곡절을 알고 싶었습니다  사실 남편도 저 못지않게  절 경계하는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하긴 제 입장에서도 하필 이런 사람과 절 결혼시킨다는게  결국 서로 감시하게 만들려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그 생각까진 저도 해봤으니까요  (* 북한 사람들이 전부 북한 당국에서 정해주는대로 결혼하는건    아니지만...저흰 여하튼 이런 특수한 처지에 놓인 신분의    사람들이잖아요)   사랑한다...그러니 진실을 말해달라  그리고...아직은 좀 너무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난 이미 두 번이나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한 사람  기회를 봐서 함께 탈출하도록 하자  만약 이번에도 실패하면 난 죽은 목숨이다  그러면서 거듭 남자를 설득했습니다  해외로 보내달라고 하든 하다못해 휴전선 인근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하든  그런식으로 해서 어떻게든  탈출할 기회를 잡자  그러면서 계속 남자를 설득했습니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니...걱정말고 내게  진실을 말해달라고요  도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온것인지를요   한참만에  남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런 설득을 시작한지 한달여쯤 지났을떄의 일일까요  좀처럼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지 않을것만 같았던 그 사람  그 무거운 입이 열렸습니다  ‘일곱살도 되기전 부모님과 이혼  그리고 쭉 외롭게 살았다  국민 학교 5-6학년 무렵 아버지가 사귀는 여자라며  새엄마가 되실분이라고 데려온 여자가 있는데  굉장히 뚱뚱하고 무식하고 못생긴 그런여자라서  그 자체가 싫었다고...  얼마나 뚱뚱한지 비유를  70-80년대 한국에서 활동하던 어떤 여성 코미디언에 비유하며   ’OOO 만큼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하는걸 보면  확실히 그 시절엔 한국땅에 살았던  남한출신인것만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헌데...  그 OOO처럼 못생기고 뚱뚱한 새엄마가 싫어서  하루는 억화심정으로  집에 불을 지르고 가출을 했다네요...  그리고  자진월북을 시도했다는겁니다  어이없게도  그...아직 국민 학교 5,6학년 밖에 되지 않았을  어린아이가...새엄마가 싫어 그런 범죄를 저지른 문제는  둘쨰치고라도  어떻게 그렇게 깜찍하게(?)  자진월북을 생각하고 그 시도가 성공했는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 딴에는 지도책 펼쳐놓고 기차 시각표까지 구해서  - 북한과 달리 남한은 그런 지도책이나 시각표 같은거 구하는건  쉬운일이니까요  치밀하게 구상을 했다고 합니다  비상식량으로 컵라면과 참치캔까지 몇 개 준비해  가방에 넣어   기차를 타고 우선 경기도 북부 휴전선 가까이 있는  역에서 내려 그렇게 월북을 시도했다고 하네요   듣고보니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나...그 생각부터 들더군요  저같은 경우는 여하튼 엄마와 이모를 다 잃고  잔뜩 힘들던차에 저한테 잘해주던 아저씨가  ’북한에서 대학다녀볼 생각 없느냐 ?‘는 말에  어린마음에 솔깃해서 넘어간거지만  세상에...이제 겨우 국민 학교 5-6학년밖에 안된 어린아이가  단지 새엄마가 싫다는 이유로  월북을 시도했다니...  너무 그 동기 자체가 어이없고 황당했지만  그래도 일단 물어보았습니다  ’지금...후회하냐 ?‘고  뜻밖에 그 사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주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말하더군요  나한테 상처준 조국...대한민국...남한...  아니 남조선(* 그 사람의 표현에 의하면)  내게 상처준 땅 남조선에 대한  철저하고 처절한 복수를 할것이고  그게 내가 여기서 간첩들 교육하는 교관을 자처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처절하고 잔인하고 끔찍한 방법으로  남조선을 무너뜨리겠다...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순간 너무 기가막혔습니다  너무 분하고 억울하고 화가났습니다  나는 그래도...어떤 이상한 아저씨의 꾀임에 빠져  아무리 그 당시 힘든 가정사가 있었기로  대학보내준다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  여기까지 오게된걸 땅을치고 후회하며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두 번이나 탈북을 시도하다  붙잡혔는데  이 남자는...  뭐...새엄마가 싫어서 집에 불을지르고 가출...  그리고 자진월북 ???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에게 상처준 남조선...아니 대한민국을  철저하게 부셔버리는 뭘 하겠다고 ?  기가막히고 화가나서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북한당국에 속아 여기까지 오게된 그 분개심 이상으로  그 남자에 대한 속았다는 생각 분하다는 생각    “ 야 !!! 이 조국을 배신한 반역자야 !!! ”  소리를 치르며  저도 모르게 총을 쏘았습니다  남자는 갑작스럽게 당한일에  속수무책으로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보위부에 붙잡혀간 저는  당당하게 남한으로 송환을 요구했습니다  아무리 당의 강요로 한 결혼이라도  난 어쨌든 남편을 죽인여자...살인자  하지만 북한이 아닌 내 고향  대한민국 법에의해 처벌받을테니  죽더라도 내 고향 한국땅에서 죽을테니  그곳에서 처벌받고 재판받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생각 어리석은 판단으로  정말 어리석은 결과를 낳게한 지금의 저  하지만 마지막으로  비록 용서받을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지언정  마지막으로 내 조국 내 고향에서 재판받고 처벌받게 해달라는  그것이 제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이땅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방편일테니까요           
  • 이전글
  • 다음글

댓글쓰기

0/200자

(댓글은 자신을 나타내는 얼굴입니다. 비방 및 악성댓글을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동방지 코드 8010

커뮤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