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니까 남의 편이 아니고 내편인 걸 깨달았어요

공지사항 25.06.05

남편 24살, 저 23살일 때 대학교 다니다 만나서 제가 첫눈에 반해서 연애했어요

연애만 6년을 했는데 연애 초반에 두 번 싸운 게 다고 그마저도 언성 높이면서 감정싸움 한 게 아니라 무슨 토론이라도 하는 것처럼 점잖게 싸웠어요ㅋㅋㅋㅋ

별로 심각한 것도 아니었고 갈등이 생겼는데 차분하게 대화하면서 풀어보는 게 처음이라 이것마저도 너무 좋더라구요

그리고 남편이나 저나 모든 걸 다 배려하고 서로한테 맞추려고 했어서 싸울 일도 없었어요

두 번 싸웠던 건 남편의 여사친 문제와 제가 요구하는 연락 빈도였는데 커플들이 자주 싸우는 단골 주제지만 저희는 정말 합의점을 딱 찾아서 해결했거든요

남편은 그때 당시에 여초과에 재학 중이었어서 여사친도 많고 자주 붙어 다니던 친구도 여자였는데 제가 이런 거에 정말 예민했어요

그래서 여사친이랑 단둘이 밥이나 술 먹고 사적으로 만나는 게 불편하다고 했더니 자기는 정말 동성 친구라고 생각해서 그랬지만 제가 싫으면 안 그러겠다고 하곤 정말로 단칼에 정리를 해버렸어요

어찌나 칼같이 철벽을 쳐놨는지 제가 다 미안해서 아예 만나지 말라는 말까지는 아니었고 단둘만 아니면 괜찮으니까 제발 친구 좀 만나라고까지 했었어요ㅋㅋㅋㅋ

남편은 혼자서 게임하는 걸 좋아하는데 저는 연애할 때 카톡도 자주 하고 전화도 자주 하는 걸 좋아해서 자주 연락했거든요?

게임하면서 연락하기 힘들었을 텐데도 1년 가까이 참다가 도저히 멀티태스킹이 안 돼서 게임할 때 연락 못할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하더라구요

그 무렵에 남편이 게임이 너무 좋다고 자기도 만들어보고 싶다면서 컴공으로 전과까지 했어서 저도 너무 미안한 마음에 게임할 때 한다고 말해주면 연락 안 하기로 했고 정말 가끔씩 말없이 연락이 뜸해도 게임하나보다 하고 말았어요

그렇게 쭉 만나다 보니 남편은 남초과에 가서 남사친들이랑만 놀게 돼서 여사친 문제로 걱정하게 될 일말의 가능성조차 사라져버렸고 저는 남편이 게임하는 걸 구경하다 보니까 궁금해져서 같이 하기 시작해서 나중에 가선 제 스팀 라이브러리가 더 커졌어요

서로 이렇게 맞춰주면서 만나니까 늘 사이도 좋았고 설렘도 그대로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데이트 끝나고 헤어지기가 너무 아쉽고 천년만년 붙어 있고 싶고 그렇더라구요

연애 2년차 쯤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남편도 비슷했는지 결혼 얘기를 슬쩍슬쩍 꺼내기 시작했는데 제가 너무 쫄보라서 모아둔 돈도 없는데 결혼하긴 무서워서 남편 졸업하고 나면, 둘 다 정규직 되고 나면, 하면서 미루고 미루다가 6년이나 연애하고 결혼했어요

6년 내내 좋아 죽었고 떨어지기가 싫어서 하는 결혼이라 로맨스 드라마처럼 달콤하고 행복할 줄만 알았어요

실제로도 처음 2년은 진짜 막 꿀이 뚝뚝 떨어지는 신혼이었어요

근데 웬걸 그 시기가 지나고 나니까 눈만 마주치면 싸우게 되더라구요

저는 주로 남편이 옷이랑 양말 뒤집어서 벗는 거, 설거지거리에 물 안 받아놓는 거, 배달음식 시켜먹고 뼈랑 양념 묻은 거 안 덮고 그냥 버려서 벌레 꼬이게 해놓는 거 등등 살림에 관련된 불만이 많았고

남편은 제가 쓴 물건 제자리에 안 놓는 거, 물건 잃어버리거나 떨어뜨리고 덜렁대는 거, 뭐 하나에 너무 집중하면 그것만 보고 몰두하는 거 등등 정리정돈이나 과집중 때문에 불만이 많었어요

처음엔 이렇게 해줄 수 있냐, 조금 신경써주라 이런 좋은 말로 부탁했었는데 나중엔 또 이래놨네, 이렇게 해달라고 했잖아 이런 말로 짜증을 내기 시작했어요

서로 해오던 생활습관이나 평생을 가지고 있던 성향이 있어서 쉽게 고쳐지지가 않았고 결국엔 수건을 걸어놨네 안 걸어놨네, 치약을 아래에서 짰네 위에서 짰네, 건조기 돌리고 문 닫아놨네 열어놨네 하면서 별의 별 사소한 것들이 다 싸움이 되더라구요

너무 사소한 거라 바로 말하기엔 뭐해서 쌓고 또 쌓다가 말하니까 감정이 섞여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한창 이렇게 싸울 땐 진짜 막 남의 편 같아서 너무 서러운데 친구들한텐 험담하기 좀 그렇고 일기에다 소심하게 막 욕했던 기억이 나요ㅋㅋㅋ

아무튼 신혼 2년 지나고 다음 2년은 매일같이 싸웠을 정도로 지옥 같았는데 이것도 지나고 나니까 다시 서로를 이해하고 양보하게 됐어요

근데 남편보다 제가 더 철이 없어서 아마 남편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싸우고 있었을지 모르겠어요

남편이 어느 날 저한테 자기 생각을 강요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차키를 컴퓨터 앞에 놨다 현관에 놨다 오락가락 하는 걸로 싸우고 있었는데 남편이 막 짜증을 내다가 갑자기 표정이 바뀌면서 탁 멈추더니 저런 말을 했어요

저는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는데 남편이 없어질까봐 너무 무서워져서 갑자기 왜 그러냐며 엉엉 울었어요...ㅋㅋㅋ

어제도 짜증 섞인 말들을 주고받았고 1초 전까지만 해도 싸우고 있었는데 저러니까 그냥 확 무섭더라구요

왜 그렇게까지 겁을 먹었었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눈물이 정말정말 없는 편인데 갑자기 우니까 남편도 놀라서 미안하다고 하고 저도 패닉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가관이었어요

옆에서 누가 봤으면 주접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ㅋㅋㅋ

남편이 먼저 이렇게 포용해줘서 정말 많이 반성했고 역시 이 사람이 없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짜증 안 내려고 노력해서 점점 싸우지 않게 됐어요

저 일도 벌써 4년 전인데 남편이랑 저랑 다시는 이렇게 싸우지 말자는 의미에서 저희끼리 그냥 종전기념일이라고 이름 붙이고 매년 결혼기념일이나 생일 챙기듯이 축하하고 있어요ㅋㅋㅋㅋ

달력에 크게 표시해놨더니 이제 5살 된 첫째딸이 이게 뭐냐고 물어서 설명해주다가 남편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바탕 추억여행을 했어요

그래서 어젯밤에 애들 재우고 잠깐만 보려고 연애할 때 주고받았던 편지들이랑 사진, 선물 같은 걸 담아둔 박스를 꺼냈는데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다가 밤까지 새버렸네요

남편이 지금 해외출장 중이라 집에 없어서 그리웠나봐요

오랜만에 옛날 생각 나고 재밌긴 했는데 벌써 해가 떠버려서.... 오늘 어떻게 출근하고 일할지 걱정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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