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를 처음 본건 중3이었어요. 처음에는 같은 반이어서 친해지게 되었고, 이때부터 저희의 이야기가 시작됐어요. 중 3땐 정말 친한 친구였어요. 말주변이 적던 제게 먼저 다가와주고, 덕분에 학교생활을 처음으로 많은 친구들과 해보았거든요. 제게 빛을 보게 해준건 그 애 였어요. 뭐랄까, 진짜 고맙고 소중한 사람이었어요. 그때까진 친구로서요. 서로 힘든 일도 생기고, 곤란한 일도 생기고, 그럴 때마다 고민상담하고 서로 의지하게 됐어요. 저와 걔 둘다 각자 다른 사람과 잠깐의 연애를 뒤로하고 헤어졌었는데, 그 때 그 애가 남친과 헤어질때 살짝 안 좋은 소문이 돌았었어요. 저는 그 애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걸 알고, 옆에 있어주면서 평소처럼 친구같이 지냈어요. 후에 말하길 그 애한테는 그게 정말 너무 고마웠다는거에요. 그땐 정말 서로를 위한 친구 딱 그 정도 였어요. 원래 이런 사이에선 연심을 품으면 안되는건데, 제가 그걸 어겨버렸어요.
고1때, 힘든 일에 대해 고민 상담 하면서, 점점 더 그 애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그 애를 차츰 좋아하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엔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했죠. 정말 친한 친구고 서로 아껴서 제가 착각하는거라고요. 근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니었어요 그게. 왠지 그 애의 곁에 제가 있고 싶다는, 그 애를 지켜주고 싶다는 그런 소망이 생겨버렸어요. 이러면 안되는건데 말이죠. 그렇게 고1 1년을 좋아하다가 그 해 겨울방학에 고백을 했어요. 하지만 당연히 그 아이는 저를 남자로 보지 않았죠. 대신 정말 소중한 친구이기에 친구로 지내자고, 어쩌면 형식적일수도, 어쩌면 무슨 말보다도 진심이었던 그 거절 멘트에 저는 납득할 수 밖에 없었어요. 제게도 그 애는 저를 꺼내준 소중하고 고마운 친구였으니까요. 저는 마음을 접겠다고 다짐하고 다시 친구로 지내기로 했어요.
근데 제가 짝사랑을 처음 해보아서 그런지, 그게 정말 힘들더라구요. 혼자 있을땐 마음도 잘 잡히고 굳건하다가도, 그 애만 보면, 하다못해 목소리만 들어도 정말 허무하게도 무너졌어요. 저는 그런 제가 한심했죠. 그렇게 고2 기간을 정말 친한 친구로 지냈어요. 그 기간동안 저는 마음을 접으려, 아니
”어쩌면 오랫동안 보다보면 그 애의 마음도 바뀌지 않을까“라는 멍청한 생각을 하며 보냈어요. 그 애를 사모하는 마음이 갈수록 커지는게 눈에 보였고, 그런 제 자신이 너무 싫었어요. 그렇게 보내다가 고2 후반기쯤, 그 애에게 남친이 생겼다는거에요. 제가 모종의 이유로 학교를 조퇴한 날. 그 애는 할 말이 있다며 제게 찾아왔어요. 전 놀랐어요. 그 애는 그렇게 막 찾아오는 성격이 아니었거든요. 내심 설렜는데, 그 애는 자기 남친이 생겼다고, 그 남친이 남자랑 단독으로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그래서 연락 못하겠다고 하는거에요. 걔는 두 달 동안이나 저랑 하는 연락만은 남겨달라고 다투다가 결국 잘 안되고 제게 말 했다는걸 덧붙였어요. 저와 그 아이는 그럼 헤어지면 다시 연락주라고, 그런 기간없는 무한의 약속을 하곤, 흩어졌어요. 저는 머리로는 당연히 이게 맞고, 그 와중에 저와의 친구 관계를 위해서 두 달 동안을 말해줬다는게 너무 고마웠어요. 그런데 몸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눈을 숨기려고 뒤돌아 냉랭하게 그 애에게서 떠났어요. 그렇게 연락이 잠시 끊겼고. 전 정말 일주일을 내내 울었어요. 학교에서 억지 웃음과 표정들을 짓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면 자기 전까지 울며 보냈어요. 그렇게 조금, 아주 조금, 미약하게나마 잊어갈때쯤, 그 애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어요.
고3 초반이었죠. 저는 그 애의 연락을 보고 처음엔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요. 아, 내가 드디어 마음이 식었나, 라고 생각이 들어서 그날 저녁에 통화를 했어요. 그동안 있었던 얘기를 나누고, 밥은 먹었냐, 약은 잘 챙겨 먹었냐, 잘자라는 등등..전화를 끊고, 저는 하염없이 울었어요. 제 울음의 이유는 오직 하나였죠. 그 아이를 잊지 못했단거에 대한 절망감과 허탈함이었어요. 저는 또 그렇게 피리 부는 그 아이를 따라가버렸답니다. 그렇게 고3기간을 그 아이와 같이 보내가던 제게, 하나의 비수가 날라왔어요. 그 애에게 또 연락하는 사람이 생겼다는거죠. 저는 심장이 내려앉았어요. 이번엔 저와의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하는 그 애가 미웠어요. 정말 미웠어요. 그렇게 또 혼자 한 달을 울고 썩어가다가, 이제 마음을 다잡고 정리해서 이렇게 두서없이 글을 써요.
네. 저 이제 마음 접었어요. 그 애의 옆에 친구로만 남으려고요. 남아서 그 애의 사랑을 응원하려고요. 물론 그 사랑의 대상이 제가 됐으면 좋겠다는,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수없이 하지만, 이제 안하려고요. 그 애의 옆을 지켜주기엔 모자라지만, 옆에 남기엔 충분한 그 정도의 아이인가봐요 저는. 그 아이는 밤을 수놓은 별자리마냥 은은했고, 들판을 덮은 풀잎마냥 생그러웠어요. 어떨 땐 폭신한 담요처럼, 혹은 넓다란 지붕처럼 제 고민을 덮어주던 그녀는, 제 연심만은 끝내 덮어주지 않았네요. 정말 많이 사랑해. 사랑했어. 이쁜 사랑 하길 바라. 그리고, 이쁜 인생 살길 바라. 이제 나는 그 근처의 향초처럼, 은은하게 피어나서 그 길을 밝혀줄게. 고마워.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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