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새겨진 지난 흔적들

공지사항 25.12.05
외톨이로 남은 30대 후반, 어린 시절의 덧없는 조각들

저는 30대 후반입니다. 제 삶은 늘 외톨이라는 그림자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감히 꺼내기 힘든 아픈 상처와 복잡한 가정사, 그리고 늘 어려웠던 인간관계는 현재까지도 저를 괴롭힙니다.
​신기하게도 저는 다섯 살 때의 기억들이 조각난 파편처럼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있습니다. 보통 나이가 들면 사는 데 바빠 어릴 적 기억은 흐릿해진다고들 하지만, 저는 그 당시의 감정까지 생생하게 보존하고 있습니다. 단지 사람들의 얼굴만 기억나지 않을 뿐입니다.

다섯 살, 외로움의 시작

​다섯 살의 제 기억은 '좋은 기억'보다는 외롭고 쓸쓸했다는 표현이 가장 정확합니다. 어린이집에서 제 곁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혼자 블록을 쌓고, 혼자 놀이터에서 그네를 탔습니다. 함께 놀아주는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저는 늘 이런 막연한 의문을 품었습니다. "애들은 왜 나랑 안 놀지? 내가 먼저 다가가도 왜 피할까?" 이 외로움은 유년 시절 내내,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그림자처럼 저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그때부터 이미 소아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우울증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부모님은 '옛날 사람'이셨기에 삶이 바쁘다는 이유로 저를 그 '우울증 감옥'에서 꺼내주지 못하셨던 걸까요.

다정함에 대한 갈망

​일곱 살 때, 저는 동네 언니, 동생들과 뛰어놀다가 집 근처 속셈 학원 선생님께 인사하는 언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언니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받아주셨고, 저는 그 모습이 늘 부러웠습니다. 저는 그저 누군가에게 다정함을 받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저는 한글과 숫자를 잘 읽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집 앞 속셈 학원에 보냈습니다. 저는 그 학원에 다니면 선생님이 저에게도 다정하게 인사해줄 거라는 기대를 품고 학원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첫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제게는 지옥이 열렸습니다. 그 학원은 가정집을 개조한 곳이었는데, 아이들이 학습지를 풀다가 틀리면 선생님께 머리채를 잡히거나 매를 맞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첫날부터 저는 온몸에 겁이 잔뜩 들었습니다.

어린 1학년에게 가해진 폭력과 학대

​저는 국어와 수학 학습지를 배웠습니다. 학습지를 다 풀고 나면 틀린 개수만큼 손바닥을 맞았고, 머리채도 잡혔습니다. 저는 계속 맞으며 위축되었고, 안 맞기 위해 필사적으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어린 1~2학년들을 상대로 폭력을 가했고, 겁에 질린 아이들을 학대했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맞으면서도 어머니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또한 저를 때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내가 문제가 있으니까 맞는 거겠지!'라고 생각했고, 설마 어머니가 저를 해치진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 도중 소변이 마려웠습니다. 하지만 제가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생님은 저에게 손을 들고 무릎을 꿇은 채 벽을 보고 벌을 서라고 시키셨습니다. 저는 얼마나 겁을 먹었던지, 벌을 서는 상황에서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벌을 서다가 그만 바지에 실례를 하고 말았고, 저는 울었습니다. 선생님은 오줌을 싼 저에게 "너 병신이야? 왜 오줌을 싸! 화장실 가고 싶다고 말을 해야지!"라고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바닥에 흐른 오줌을 향해 __를 던지며 닦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바닥을 닦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

​집에 오자 어머니는 마당에서 오줌을 싼 저를 씻기셨습니다. 우리 집은 1층이었고, 학원은 바로 옆집 윗집이라 마당이 다 보이는 구조였습니다. 어머니는 몸을 씻겨주면서 오줌을 싼 이유를 물으셨고, 저는 "벌을 서고 있는데 선생님이 무서워서 말을 못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셨습니다.
​다음날 학원에 갔더니, 선생님은 제가 마당에서 어머니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는지 저에게 경고했습니다. "너 엄마한테 벌 서고 맞는 거 다 네가 잘못해서 처벌하는 거니까 말하지 마."
​그 이후에도 선생님은 계속해서 저를 때리고 인신공격성 폭언을 가했습니다. 그 체벌이 너무나 무서웠던 저는, 드디어 학교에서 받아쓰기 100점을 맞고 '엄마한테 보여주면 칭찬받겠지?'하는 생각으로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서 칭찬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무관심으로 일관하셨고, 항상 못하는 것만 가지고 저를 때리고 다그치셨습니다. 그때 한 살 위 언니가 구구단 100점을 맞았는데, 어머니는 언니에게는 아낌없는 칭찬과 사랑을 쏟아내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큰 배신감과 좌절을 느꼈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서 칭찬과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무뚝뚝했지만, 제가 100점을 맞았음에도 어머니께 칭찬을 못 받고 풀이 죽어 있는 저에게 "100점 맞았네. 잘했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늘 저에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아빠라는 존재: 믿음과 배신, 그리고 5억의 그림자

이전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저에게 사랑을 주었던 존재로 남아있습니다. 무뚝뚝한 분이었지만, 한 살 위의 언니와 저를 언제나 평등하게 사랑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딸에게"라는 다정한 편지를 써주시기도 했고, 어머니와 제가 다툴 때면 제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물론 아버지도 화가 나실 때는 심하게 때리시곤 했지만, 때리고 나서는 언제나 "미안하다"며 먼저 다가와 저를 달래주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저는 20대 후반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아버지와 갑작스럽고 불행한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예상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 이별은 저를 무너뜨렸습니다.

드러난 추악한 실체와 5억의 빚

​아버지가 떠난 후, 저는 아버지의 추악한 실체와 마주해야 했습니다. 가장 먼저 저를 짓눌렀던 것은 아버지가 남기고 간 5억 원이라는 막대한 빚이었습니다.
​그리고 충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내연녀와 주고받은 통화 녹음 내용과 카카오톡 메시지까지 모두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회사 사장님과 지인들을 통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이면과 감춰진 모습들에 대해 자세히 듣게 되었고, 저는 그 모든 사실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는 그동안 아버지에게 당했던 모든 행동을 저에게 털어놓으셨습니다. 저는 이 모든 진실과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웠고, 결국 정신이 나가버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정신병원에서의 회복과 끝나지 않은 지옥

​정신을 온전히 유지할 수 없었던 저는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엉망이 된 마음을 조금씩 추스르며 회복해 나갔습니다.
​회복 후 퇴원했지만, 제 삶의 지옥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현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와 언니의 '몹쓸 병': 외톨이의 몸에 새겨진 상처

​어릴 적 저는 성장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아버지를 따라 등산도 하고 산에서 잘 뛰어놀았습니다. 그런데 여섯 살부터 초등학교 1학년까지 살던 동네에서, 부모님은 학교와 가까운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를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대출을 받아 이사한 아파트 생활은 처음에는 나름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여전히 저와 놀아주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저는 옛 동네 친구들이 그리웠고, 학교에 다녀오면 혼자 외로움에 눈물로 밤을 보내곤 했습니다. 부모님은 맞벌이로 바쁘셨습니다.

원인 모를 다리 통증과 수술

​그때 저는 '내가 몹쓸 병에 걸려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고 스스로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갑자기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하더니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부산의 유명한 정형외과를 모두 찾아다니셨지만, 다리 통증의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원인불명의 상태에서, 외관상 오른쪽 다리가 O자형으로 변형되어 있었기 때문에 O자 다리 교정 수술을 하면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을 거라는 소견을 받았습니다. 결국 대학병원에서 네 시간이나 걸리는 대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어머니와 언니가 제 곁에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제 이마에 뽀뽀를 해주시며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아주 조금이나마 어머니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에서 호흡기를 단 채 깨어났을 때, 곁에는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마취가 풀리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습니다. 다리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었습니다.

부모님의 무관심과 장애

​성인이 되어 받는 수술과 어릴 때 받는 수술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성인이 되어 다른 수술을 받을 때는 모든 과정을 알고 관리도 철저히 했지만, 어릴 때 큰 수술을 받고 나서는 부모님이 관리를 해주거나 주의 사항을 알려주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수술 후 병원 진료만 같이 다닐 뿐, 제게 어떤 것도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제 수술한 다리는 O자형으로 남아 불구가 되었고, 저는 뒤뚱거리며 걷고 잘 뛰지 못합니다.

​ 언니에게서 시작된 희귀병, 윌슨병

​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에게 갑자기 입이 돌아가는 증상이 나타났고 아침에는 심한 발작 현상을 일으켰습니다. 급히 응급실로 갔지만 언니의 증상은 계속 악화되었고, 대학병원에 장기간 입원하여 전신 검사를 받았으나 교수님들조차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랜 입원 끝에 마침내 언니의 병명이 밝혀졌습니다. 바로 유전 질환이자 희귀병인 '윌슨병'이었습니다. 희귀병이라 대학병원 교수님들도 바로 병명을 찾아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유전병 진단에 따라 부모님과 저도 모두 검사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부모님은 윌슨병이 없으셨지만, 저 또한 윌슨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다만 저는 심한 정도는 아니었기에, 약물과 식이 조절만 잘하면 더 이상 악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견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심각한 언니에게 더 집중하셨고, 저에게는 "너는 안 심해서 안심하라"며 안심시키셨습니다. 언니는 6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지냈습니다. 중학생이었던 언니의 병원비, 입원비, 약값까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저희자매의 병을 알게 된 저의 담임 선생님을 통해 부산일보에 기사가 나면서 지자체로부터 후원금과 후원 물품을 지원받았고, 언니는 장애 3급을 받아 나라에서 병원비를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 엄마의 착각과 뒤늦은 치료

​당시 저는 부모님의 돌봄이 필요한 나이였지만, 어머니는 심한 언니에게만 집중하여 언니 약만 처방받게 하셨고, 저는 약마저 처방받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아버지가 제 약을 챙겨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계속 "너라도 덜 아프니 다행이다", "너까지 아프면 엄마는 힘들다"는 말을 주입시키셨습니다. 어머니의 말과 달리 저는 계속 아팠지만, 어머니는 저에게 자연요법만 고집하셨습니다. 결국 서른 살이 되어서야 스스로 대학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어릴 적 다리 수술 이후 대학병원 방문은 저에게 큰 두려움이었지만, 다행히 입원 없이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검사 결과를 들은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현재 주치의 교수님은 윌슨병 진단과 함께 어릴 적 뇌 검사 기록을 비교해 보시더니, "어릴 때도 뇌에 윌슨병이 왔는데, 어머니께서는 모르셨나요?"라고 물으셨습니다. 어머니는 그제야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으셨습니다.
​교수님은 어머니께 "윌슨병은 약물로 병의 진행을 막아야 하는데, 어릴 때부터 약을 잘 챙겨 먹이고 이 병의 위험성을 알았더라면 더 악화되지는 않았을 텐데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뒤늦게 경증장애 판정을 받고 신경과에서 통원 치료를 받으며 3개월에 한 번씩 약을 타 먹기 시작했고, 점차 회복되었습니다.

회복할 수 없는 증상들

​하지만 회복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되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수님은 약물은 단지 윌슨병의 주범인 구리 대사 이상을 막아 병의 진행을 늦추는 것일 뿐, 이미 나타난 우울감, 어눌한 말투, 손 떨림, O자 다리, 조울증, 치매 증상 등은 어쩔 수 없는 이 병의 증상이라고 하셨습니다. 신경과에서 증상을 억제하는 약을 추가로 처방받았고, 이는 조금의 효과는 있었습니다.
​저는 다리가 O자 다리가 되었을 때 원인도 모른 채 수술대에 올랐다는 사실을 서른 살에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그때도 나에게 관심이 없으셨구나'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저를 보살펴주신 어머니께 고마움과 미안함이 들면서도, 원망스러운 마음도 함께 들어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꼈습니다.


엄마의사랑과 희생, 그리고 나의 혼란스러운
감정...

​아버지는 이미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남겨진 저희 자매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저희자매는 내일모레 마흔인데도, 어머니는 혹시라도 저희가 굶고 다닐까 봐 일터에 나가 일하시고, 쉬는 날에도 따로 아르바이트를 하십니다.
​어머니는 올해 65세로, 여기저기 아프셔서 병원도 자주 다니셔야 합니다. 저도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정작 저는 어머니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둘째 딸입니다.
​저는 스스로 불효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말 나쁜 딸입니다.
​현재 저의 마음속은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이라는 복잡한 감정들이 동시에 뒤섞여 저를 끊임없이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자매의 갈등: 끝나지 않는 전쟁과 폭력의 상처

​저는 어릴 적 언니를 매우 따랐습니다. 한 살 터울이라 생김새는 쌍둥이처럼 똑같았지만, 저희의 성장 속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어머니는 언니가 다섯 살 때부터 한글을 읽고 일곱 살 때 구구단을 완벽히 외웠다며, 영특하고 똑똑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저에게 하셨습니다. 반면 저는 모든 것이 느렸고 말도 느렸습니다.
​이로 인해 어릴 때 언니의 잘못까지 제가 뒤집어쓰고 어머니께 매를 맞거나 집 밖으로 쫓겨나는 일이 잦았습니다. 말을 제대로 할 줄 몰라 늘 언니에게 당하고 살았습니다.

외면과 배신감

​초등학교 시절, 제가 학원 선생님에게 맞고 있는 모습을 언니가 목격했음에도 모른 척 지나가는 모습은 아직까지 제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중학생 때, 농협 통장에 모아두었던 20만 원과 처음 만든 체크카드를 지갑에 넣어두었는데, 언니가 제 체크카드를 훔쳐서 사용하고 다녔습니다.
​어릴 때부터 언니는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서, 언니 친구들이 저에게 찾아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러 오기도 했습니다. 거짓말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저는 순진하게 모든 것을 솔직히 말했고, 결국 저로 인해 언니의 거짓말이 탄로 났습니다. 이에 언니는 저를 단소로 때리고 꼬집는 등 계속해서 괴롭혔습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된 폭력과 패배

​어릴 때는 일방적으로 당하고 살았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저도 언니와 맞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언니와 싸울 때마다 저는 항상 패배했습니다. 언니는 저에게 폭력을 가했고, 저는 폭력의 상처가 커서 늘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경찰까지 부르는 일이 발생했고, 저는 결국 여성 쉼터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 후에도 저희의 싸움은 계속되었고, 언니의 폭언과 폭행이 심해지자 저는 응급실에 몇 번 실려 갔으며, 결국 집을 나와 고시텔에서 생활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언니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셀 텐데, 왜 치고받고 싸울 때마다 늘 패배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친구들도 "언니는 네가 밀면 날아갈 텐데 왜 항상 네가 패배하냐"고 농담 삼아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현재 독립해서 살고 있지만, 언니와 저의 관계는 여전히 '전쟁 중'입니다.

언니에게 겪은 깊은 상처와 결단
​저는 언니와의 관계에서 겪은 깊은 상처와 억울함 때문에 이 이야기를 꺼냅니다. 저 스스로 얼굴에 침 뱉는 격이 될 수도 있음을 알지만, 이 일을 가슴에 묻어두고 싶지 않습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사건들보다 더 심각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진심으로 좋아했던 남자친구와 교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니가 그 남자친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남자친구가 저에게 싫증을 내는 것 같아 먼저 이별을 고했습니다.
​이후, 그 남자친구를 소개해 준 친구에게서 "네 언니랑 네 전 남자친구랑 사귄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제 세상은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극심한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고, '이런 쓰레기 같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구나'라는 쓴맛을 다시 한번 경험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 언니와 함께 사는 동안 수없이 다투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시 정신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워 신앙의 힘을 빌려 교회 활동에 매진했습니다. 언니를 용서할 수는 없었지만, 제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니는 제 전 남자친구와 6년 동안 교제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언니는 오픈채팅 번개 모임에 빠져 각종 사기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폰 사기, 소액 결제 사기, 심지어 대출까지 받으려 했던 것을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기꾼들을 고소하여 대출 시도를 막아냈습니다.
​하지만 고소 후, 가해자들이 저희 어머니를 찾아와 "고소 취하를 하지 않으면 두 딸을 칼로 찌르겠다고 협박하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결국, 어머니와 저의 안전을 위해 고소를 취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사기꾼들과 계속 연락을 이어갔고, 결국 나쁜 길로 빠져 불법적인 일을 하다가 저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저는 결국 언니를 경찰에 고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경찰서에서는 언니를 처벌해도 벌금형밖에 나오지 않으며, 어머니가 벌금을 대신 납부해야 언니의 구속을 막을 수 있는데, 그래도 고소하겠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순간 또다시 좌절감과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제가 언니에게 합당한 벌을 줄 수 없다는 현실, 그리고 어머니가 대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 다짐했습니다. 다시는 언니가 저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언니는 지금도 끊임없이 저에게 피해를 주고 괴롭힙니다. 저는 언니를 차단했지만, 어머니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언니를 완전히 무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저도 언니와 똑같이 행동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의 가정사를 비난하거나 안 좋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제 언니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을 것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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